박영효(朴泳孝, 일본식 이름: 山崎永春(야마자키 에이하루), 1861년 ~ 1939년 양력 9월 21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로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다. 북학파 박지원의 저술을 통해 평등사상을 배우는 한편 오경석이 베이징(北京)에서 가지고 온〈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 등 청나라와 외국의 개화서적을 돌려보면서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1870년대 후반에 개화당을 조직했다.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귀국하였으며 을미사변과 갑오개혁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하였다. 일본 체류 중 1900년 7월 고종의 폐위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1907년 특별사면을 받고 귀국하였으나 이완용의 고종 양위 계획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투옥,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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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효(朴泳孝, 일본식 이름: 山崎永春(야마자키 에이하루), 1861년 ~ 1939년 양력 9월 21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로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다. 북학파 박지원의 저술을 통해 평등사상을 배우는 한편 오경석이 베이징(北京)에서 가지고 온〈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 등 청나라와 외국의 개화서적을 돌려보면서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1870년대 후반에 개화당을 조직했다.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귀국하였으며 을미사변과 갑오개혁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하였다. 일본 체류 중 1900년 7월 고종의 폐위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1907년 특별사면을 받고 귀국하였으나 이완용의 고종 양위 계획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투옥, 유배되었다. 일제 강점기초반에는 기업과 은행 활동에 전념하던 중, 조선총독부의 회유와 타협에 응하여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의 고문을 지냈다. 조선의 마지막 부마로, 조선 철종의 사위이기도 하다. 1882년 일본으로 건너가는 배 안에서 조선의 국기인 태극기를 최초로 도완, 제작하였다.어릴적 이름은 무량(無量), 자(字)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은 반남이며, 일본식 이름은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하기 전 천세환의 선원 스치 후치츠로(十藤十郞)이 지어준 것이다. 당색으로는 노론 계열이었고, 박규수(朴珪壽),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
  • 박영효(朴泳孝, 일본식 이름: 山崎永春(야마자키 에이하루), 1861년 ~ 1939년 양력 9월 21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로 개화당이다. 철종의 부마로 금릉위 상보국숭록대부에 올랐으며 고종의 고모부다.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며 모두 실패해 도합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882년 도일(渡日) 중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꿔 재도안했고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됐다.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동문수학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해 다시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장장 13만 8천 자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놀래켰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개화파들과 함께 일본으로 다시 쫓겨갔다. 일본 망명 기간 고종의 폐위를 기도했다는 혐의를 받기도 했으며, 이후 1907년 특별사면으로 귀국한 뒤 고종 양위를 반대해 투옥, 유배됐다. 대한제국 멸망 후 일본 정부에게 받은 은채 공사금 28만원으로 일제 강점기 초반에는 기업과 은행 활동에 전념했으며, 이후 중추원 고문과 귀족원 의원을 지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 편수회 고문도 지냈다. 어릴적 이름은 무량(無量), 자(字)는 자순(子純), 호는 춘고(春皐), 현현거사(玄玄居士), 본관은 반남이며, 일본식 이름은 야마자키 에이하루(山崎永春)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할 때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노론으로 북학파 박규수(朴珪壽),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이다. 경기도 수원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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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버지 박원양, 어머니 전의 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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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효 :친일 거두가 된 개화파 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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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영효(朴泳孝, 일본식 이름: 山崎永春(야마자키 에이하루), 1861년 ~ 1939년 양력 9월 21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로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다. 북학파 박지원의 저술을 통해 평등사상을 배우는 한편 오경석이 베이징(北京)에서 가지고 온〈해국도지〉(海國圖志)·〈영환지략〉(瀛環志略) 등 청나라와 외국의 개화서적을 돌려보면서 김옥균(金玉均)·서광범(徐光範)·홍영식(洪英植) 등과 함께 1870년대 후반에 개화당을 조직했다.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주도하였으나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했다 귀국하였으며 을미사변과 갑오개혁으로 다시 일본에 망명하였다. 일본 체류 중 1900년 7월 고종의 폐위를 기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이후 1907년 특별사면을 받고 귀국하였으나 이완용의 고종 양위 계획을 반대하는 과정에서 투옥, 유배되었다.
  • 박영효(朴泳孝, 일본식 이름: 山崎永春(야마자키 에이하루), 1861년 ~ 1939년 양력 9월 21일)는 조선 말기의 문신, 정치인, 사상가로 개화당이다. 철종의 부마로 금릉위 상보국숭록대부에 올랐으며 고종의 고모부다. 갑신정변을 일으켰고 갑오개혁을 주도했으며 모두 실패해 도합 20여 년이 넘는 일본 망명 생활을 해야 했다. 1882년 도일(渡日) 중 배에서 고종의 명으로 제작된 '이응준 태극기' 중 4괘(卦)의 좌·우를 바꿔 재도안했고 이것이 태극기의 원형이 됐다.1884년 김옥균, 홍영식, 윤치호, 서재필, 서광범 등 동문수학들과 갑신정변을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일본에 망명했다가, 청일전쟁에 승리한 일본을 등에 업고 귀국해 다시 갑오개혁을 주도했다. 장장 13만 8천 자에 달하는 개혁 상소문을 올려 세상을 놀래켰지만 호응을 얻지 못하고 개화파들과 함께 일본으로 다시 쫓겨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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