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음력 1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후기의 문신, 정치인, 작가이며 구한말의 정치가·혁명가로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별호는 고우(古遇)이며, 시호는 충달(忠達), 본관은 (신)안동이다. 인조 때 우의정으로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10대 손이다. 병태(炳台)의 장남으로 7세 때 당숙 병기(炳基)의 양자로 입양되어 한성에서 성장하였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사 시찰단이 되어 일본에 다녀와 개화 문물을 체험한 후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져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해 개혁을 꾀했다.양아버지 김병기를 따라 강릉에서 율곡 학파의 서당에서 학문을 접하고 1870년(고종 8년) 초부터는 유대치, 박규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동인 등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1872년(고종 10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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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음력 1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후기의 문신, 정치인, 작가이며 구한말의 정치가·혁명가로 자는 백온(伯溫), 호는 고균(古筠), 별호는 고우(古遇)이며, 시호는 충달(忠達), 본관은 (신)안동이다. 인조 때 우의정으로 지낸 문충공 김상용의 10대 손이다. 병태(炳台)의 장남으로 7세 때 당숙 병기(炳基)의 양자로 입양되어 한성에서 성장하였다. 강화도 조약 이후 조사 시찰단이 되어 일본에 다녀와 개화 문물을 체험한 후 개화사상에 관심을 가져 박영효, 서광범 등과 함께 개화당을 조직해 개혁을 꾀했다.양아버지 김병기를 따라 강릉에서 율곡 학파의 서당에서 학문을 접하고 1870년(고종 8년) 초부터는 유대치, 박규수 등의 문하에 출입하면서 이동인 등을 만나 개화사상을 갖게 되고, 1872년(고종 10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나갔다. 1879년 이동인을 파견하여 일본의 정세를 파악한 뒤 1881년 이후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의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왔으며 일본 유학생 파견과 군사 견습생 파견운동을 주도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승정원우부승지·참의교섭통상사무·이조참의·호조참판·외무아문협판 등을 역임하며 개화파의 확산에 힘썼다. 1883년 6월에는 서재필, 서재창, 이규완 등 청년들을 일본으로 유학시켜 군사 훈련을 받게 했다.1884년 초부터 박영효 등과 정변을 기도, 그해 12월 우정국 낙성식을 계기로 홍영식 등과 함께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개입으로 3일만에 갑신정변 실패한 이후 인천항을 통해 일본으로 피신하여 망명생활을 지냈으나, 여러 차례 테러위협에 시달리다가 청나라로 망명했다. 1894년 청나라 상하이 호텔에서 홍종우에 의해 암살당했다. 사후 시신은 부관참시되어 8도에 효수되었으나 1895년(고종 32년) 개화파 내각이 들어서면서 복권되고 순종 때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되었다. 그는 당대의 명문가 출신이었으나 급진개화파로서 1884년(고종 22년) 초부터 갑신정변을 계획, 주도하였다. 그는 1883년(고종 20년) 4월 독도에 주민을 입주시켜 독도 유인도화 정책을 고종에게 건의하여 시행케 했다.일본식 이름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하기 전 천세환의 선원 스치 후치츠로(十藤十郞)이 지어준 것이다. 충청남도 출신.
  •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 사상가, 급진개화파이다. 장원급제 후 여러 요직을 거치며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 사상 확산에 힘썼고,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다.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 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다 못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준비부족으로 청나라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했으며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중국 상해에서 살해됐다. 본국 송환된 시신은 부관참시돼 8도에 효수됐다. 청일전쟁 때까지 중일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존재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동양 3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후일 개화파가 집권한 뒤 복권됐고 일제 강점기 순종에 의해 충달공의 시호가 추서됐다.본관은 장동(신 안동), 호는 고균(古筠), 별호는 고우(古遇), 일본식 이름은 이와다 슈사쿠(岩田周作)로, 갑신정변 실패 후 망명길에 치토세마루 호 선원 츠지 도쥬로(辻藤十郞)가 지어줬다 한다. 이와타 상와(岩田三和)란 이름도 사용했다. 박규수, 유대치, 오경석의 문인으로 충청남도 대전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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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는 백온, 호는 고균, 고우, 시호는 충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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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호는 충달
  • 자는 백온
  • 호는 고균, 별호는 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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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dbpedia-ko:김병기_(1814년)
  • 은진 송씨
  • 전주 이씨
  • 풍양 조씨
  • 생부김병태 / 생모 은진 송씨, 양부 형조참의 김병기 / 양모 전주 이씨, 풍양 조씨
  • 김병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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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金玉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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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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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화파의 개혁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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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옥균(金玉均, 1851년 2월 23일 ~ 1894년 3월 28일)은 조선 말기의 정치가, 사상가, 급진개화파이다. 장원급제 후 여러 요직을 거치며 충의계를 조직해 개화 사상 확산에 힘썼고, 동남제도개척사 겸 포경사에 임명돼 울릉도와 독도를 개척했다. 임오군란 후 일본식 급진 개혁을 주장했으나, 양무 운동식 점진적 개혁을 주장하는 외척 민씨 세력에 번번히 발목을 잡히다 못해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준비부족으로 청나라에 막혀 3일 만에 실패했으며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오랜 망명 생활 끝에 중국 상해에서 살해됐다. 본국 송환된 시신은 부관참시돼 8도에 효수됐다. 청일전쟁 때까지 중일 두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그의 존재는 늘 뜨거운 감자였으며 동양 3국 어디에도 그의 자리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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